
흑산도 유배지에서 탄생한 조선 최고의 어류학서, 자산어보. 이준익 감독의 흑백 시대극 '자산어보'는 정약전과 창대라는 두 남자의 만남을 통해 지식이 어떻게 신분을 뛰어넘고 진리로 완성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정치적 실패자였던 양반 학자와 양반을 꿈꾸던 천민 어부, 이들의 역설적 관계가 빚어낸 학문적 성취는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을 전합니다.
실학정신으로 완성된 백성의 학문
정약전은 천주교 사학죄인으로 흑산도에 유배된 인물입니다. 그는 동생 정약용이 집필한 목민심서처럼 권력자의 행동가짐을 논하는 차원을 넘어, 실제 백성들의 삶과 직결된 먹거리인 해양생물에 대한 저서를 기획합니다. 이것이 바로 실사구시, 즉 사실에 입각하여 진실을 탐구하는 실학의 정신입니다.
영화 속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만난 창대의 물고기 지식에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민어, 문어, 홍어, 우럭 등 수백 종의 어류를 구분하고 그 습성과 맛, 조리법까지 꿰뚫고 있는 창대는 책으로만 공부한 양반들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생생한 지식의 보고였습니다. 정약전은 창대가 말한 내용을 글로 옮기며 "네가 지금 말한 것을 글로 써야 되겠느냐. 글로 쓸 만한 값어치가 되는 거라"라고 말합니다.
자산어보는 십수 년간 어류, 패류, 조류 등 수산생물을 분류해 기록한 책으로 총 3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단순히 종류만 나열한 것이 아니라 "맛은 농어를 닮아 살은 약간 단단하다", "잘 삶아서 기름을 처먹는 불을 피울 때 대나무를 사용하면 그을려지지 않는다"는 식으로 조리법까지 상세히 기록했습니다. 심지어 "임산부의 여러 가지 병을 고치는 데 이보다 나은 것은 없다", "뱀에 물린 데에는 홍어의 껍질을 붙이면 잘 낫는다"는 민간요법까지 집대성했습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척수 개수로 어종을 분류하는 방법입니다. 이 분류법은 19세기 후반에서야 서양에서 등장했는데, 자산어보는 그보다 훨씬 앞서 이 과학적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이는 조선의 실학이 단순한 관념론이 아닌 철저한 관찰과 기록에 기반한 과학적 학문이었음을 증명합니다. 실제로 자산어보는 동의보감과 함께 국가 중요 과학기술 자료로 등재되었습니다.
정약전의 실학정신은 백성의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지식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진 변방, 흑산도라는 조선의 끝에서 오히려 백성들에게 가장 필요한 학문이 탄생했다는 역설은 진정한 지식이 무엇인지 되묻게 합니다.
신분초월한 스승과 제자의 우정
영화의 가장 큰 감동은 양반 정약전과 천민 창대 사이의 관계 변화입니다. 처음 만났을 때 창대는 "나리는 사학죄인께요. 400년을 이어온 주자의 나라에서 임금도 없고 부모도 없고 제사도 안 모신다니 그것이 역적이지"라며 정약전을 경계합니다. 신분은 낮지만 성리학의 질서를 철저히 믿는 창대에게 천주교를 믿었던 정약전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정약전은 창대의 물고기 지식에서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내가 아는 지식이랑 너의 물고기 지식이랑 바꾸자"는 제안으로 시작된 지식 거래는 점차 진정한 사제지간으로 발전합니다. 한양 출신 사대부의 커리큘럼을 받게 된 창대는 대학 책을 읽으며 눈이 커지고, 정약전은 창대의 해박한 해양생물 지식을 통해 자산어보의 기초를 다져갑니다.
두 사람의 시회 장면은 양반들의 힙합 사이퍼 대결처럼 펼쳐집니다. "상평동, 즉 시 짓기 대결"에서 창대가 보여준 재능에 정약전의 제자들조차 놀라워합니다. 신분의 벽을 넘어 순수한 학문적 교류가 이루어지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영화는 이 아름다운 우정에 균열이 생기는 과정도 냉정하게 그려냅니다. 창대는 결국 입신양명의 길을 택하고 자신을 버린 양반 아버지를 찾아가 "아버지 얼굴에 먹칠을 안 하고 애비 없는 호래자식 소리 안 들으려고... 이 양반 씨를 서자 말고 양자로 올려 주시오"라고 청합니다. 과거를 보기 위해서는 신분 상승이 필요했고, 창대는 현실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약전은 "내가 바라는 것은 양반도 상놈도 없고 적자도 서자도 없고 주인도 노비도 없고 임금도 필요 없는 세상이다"라고 자신의 이상을 밝히지만, 창대는 "선생님처럼 잘못된 생각을 가진 분과 함께하다가 나요... 제 앞길도 위험해지고 있습니다"라며 결별을 선언합니다. 계층을 넘은 우정의 한계를 보여주는 장면이지만, 동시에 각자가 처한 현실의 무게를 이해하게 만듭니다.
지식교류로 탄생한 불멸의 기록
자산어보의 진정한 가치는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두 사람의 지식 콜라보에서 나왔습니다. 정약전의 서문에는 실제로 "섬사람 덕순, 즉 장창대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면서 독실하게 옛 서적을 좋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이는 창대가 단순한 영화적 창작이 아닌 실존 인물이었음을 증명합니다.
영화 속에서 창대가 지어준 '자산'이라는 이름에도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흑산'이라는 어둡고 무서운 이름을 꺼려했던 정약전을 위해 창대는 검을 흑 대신 검을 자를 사용한 자산이라는 이름을 제안합니다. 실제 역사에서도 정약전이 흑산이란 이름을 피했다고 알려져 있어, 이 설정은 사실에 기반한 것입니다.
정약전은 해양생물들을 직접 해부하며 분석했습니다. 양반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는 창대와의 거래를 통해 얻은 물고기들을 철저히 관찰하고 기록했습니다. 창대의 경험적 지식과 정약전의 학문적 체계가 만나 자산어보는 단순한 물고기 목록이 아닌, 생태와 활용법까지 아우르는 종합 어류학서로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
이준익 감독이 이 영화를 흑백으로 제작한 이유도 주목할 만합니다. 씨네21 인터뷰에서 감독은 "흑백이기에 도달할 수 있는 깊이가 있고 촬영지였던 비금도 일대의 풍광을 운치 있게 표현했다"라고 밝혔습니다. 실제로 영화를 보면 마치 한 편의 수묵화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는 자산어보라는 고전 서적의 무게감과 시대성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장치입니다.
영화는 3층 구조의 깊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1층은 포켓몬 도감을 수집하듯 물고기를 잡고 기록하는 재미, 2층은 정약전과 창대의 우정이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드라마, 그리고 지하 3층에는 신분은 천하지만 성리학을 신봉하는 창대와 신분은 높지만 실학과 서학을 품은 정약전이 세상의 이치에 대해 논하는 철학적 담론이 담겨있습니다.
정약용이 형 정약전을 "범상치 않고 기걸하다"고 표현했듯이, 정약전은 조선 후기 지식인의 전환점에 섰던 인물입니다. 그가 흑산도에서만 머물려 했을 때 주민들이 막았고, 동생을 보러 잠시 떠나려 할 때도 다시 돌아오게 했다는 일화는 그의 덕망과 영향력을 보여줍니다.
지식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진리는 삶 속에서 완성된다는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유효합니다. 정치적으로는 실패한 유배인 정약전이 조선의 변방 흑산도에서 이룬 학문적 성취는 진정한 지식의 가치가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끝이자 시작이었던 그곳에서, 서로 다른 세계에 살던 두 사람의 지식 교류가 만들어낸 자산어보는 200년이 지난 지금도 국가 중요 과학기술 자료로 인정받으며 그 가치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출처]
영상 제목/채널명: https://youtu.be/G0KU6HvNYd8?si=jmEvrsf-wpWoKw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