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후기, 외세의 침입과 내부 붕괴가 동시에 진행되던 혼란의 시대에 한 천재 화가가 있었습니다. 거지 출신으로 시작해 조선 최고의 화가로 우뚝 선 오원 장승업의 삶은 그 자체로 드라마였습니다. 영화 '취화선'은 술에 취해 그림을 그리는 신선이라는 뜻으로, 장승업의 별칭이기도 합니다.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은 예술이 반드시 안정적인 환경에서만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삶의 경험 속에서 창작될 수 있음을 증명합니다.
거지에서 천재화가로: 장승업의 운명적 만남들
장승업의 어린 시절은 비참했습니다. 거지왕초 밑에서 온갖 구박을 받으며 살아가던 그는 청계천변에서 맞아 죽을 뻔한 위기를 맞았습니다. 이때 효자동 김선비 김병문이 그를 구해주면서 운명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김병문은 한 가게에 걸린 새그림들이 모두 장승업의 솜씨임을 알고 깊이 놀랐습니다. 타고난 재능을 알아본 김병문은 장승업을 스승 우남 이응헌에게 데려갔습니다.
이응헌은 장승업에게 그림의 기본을 가르쳤습니다. "첫째는 골법용비린이라, 둘째는 농담이니라. 농담은 멀고 가까움을 드러내고 그림 속에 깊은 맛을 우러나게 하지"라는 가르침 속에서 장승업은 밤을 잊고 그림 공부에 매진했습니다. 5년 만에 노안이 되어 나타난 장승업은 스승이 중풍으로 쓰러진 후에도 머슴처럼 일하며 천자문과 소학을 떼어 까막눈을 면했습니다. 글을 모르면 그림이 되지 않는다는 스승의 가르침을 따른 것입니다.
역관 이응헌의 집에 머물며 장승업의 천재성은 더욱 빛을 발했습니다. 명나라 진가원의 수선매작도를 한 번 훔쳐본 것만으로 똑같이 그려냈을 때, 모든 이들이 경악했습니다. "낙관만 없을 뿐이지 옆에다 놓고 그린 것처럼 똑같습니다. 똑같다는 게 대단한 게 아니라 그 행동하는 모습이 그대로 전달되질 않습니까"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그의 관찰력과 기억력은 놀라웠습니다. 이후 해산 유숙 선생의 제자가 된 장승업은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화풍을 개척하기 시작했습니다.
도화서 감찰까지: 완성 없는 예술의 길
육교 화방에서 해산 유숙의 제자가 된 장승업은 모사를 넘어 진정한 예술의 본질을 배웠습니다. 유숙은 귀거래도를 그린 장승업에게 "모양만 갖춘다고 그림인가? 모사에 담긴 뜻을 알아야지"라고 질책했습니다. 도연명이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는 쓸쓸함이 드러나야 하며, "의재필선(意在筆先)"이라 했듯이 눈에 보이는 필선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긴 뜻이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림은 완성이란 없어"라는 스승의 말은 장승업의 평생 화두가 되었습니다.
유숙은 장승업에게 겸재, 현재, 공재의 삼재처럼 '원(園)'자를 호로 쓰라고 권했습니다. 장승업은 '나오(吾)' 자를 넣어 '오원(吾園)', 즉 '나도 원이다'라는 호를 지었습니다. 단원, 혜원의 뒤를 잇겠다는 포부였습니다. 스승은 "너는 글 없이 그림만으로 완벽한 너만의 화법을 개척해야 될 때"라고 말하며 그를 세상으로 내보냈습니다. 장승업은 산과 들, 나무와 꽃, 자연 속에서 깊은 깨달음을 얻었고, 열폭 병풍 '홍백매도'는 단연 빼어난 작품으로 평가받았습니다.
사또 앞에서의 휘호 사건은 장승업에게 큰 교훈이 되었습니다. 사또의 명으로 스승보다 먼저 붓을 든 장승업은 유숙에게 호되게 꾸중을 들었습니다. "아무리 사또의 명이라 하나 세 번 사양하라는 성현의 가르침이 있는 법. 감히 스승을 제치고 먼저 붓을 들다니. 사양지심이 없는 인간은 금수만도 못해"라는 질책이었습니다. 하지만 유숙은 이미 세인들의 평가가 자신을 넘어섰음을 인정하며 "이 마당에 와서는 내 숨결과 혼백이 살아있는 너만의 그림을 그려야 할 때"라고 격려했습니다.
이후 장승업은 수십, 수백, 수천 장의 그림을 지우고 버리고 다시 그리기를 반복했습니다. "당장의 유익과 명예에 눈이 멀어 비나 맞춰주는 그림은 죽은 송장"이라는 스승의 말에 따라 진정한 자신만의 화풍을 찾으려 했습니다. 마침내 온몸의 기가 붓을 타고 흐르는 경험을 한 후, "거칠도록만 호방하고 거침없는 필묵, 모든 게 파격일세"라는 평가를 받는 독창적인 그림이 나왔습니다. "일획이 만획이고 만획이 일획이로다. 내 일획을 두고 어찌 따로 법을 말하리오"라는 경지에 이른 것입니다. 그의 명성은 높아져 궁궐에서 사람이 나왔고, 도화서를 거치지 않은 화공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대접을 받으며 감찰의 벼슬까지 올랐습니다.
자유로운 방랑: 예술가의 진정한 독립
하지만 궁궐 생활은 장승업에게 맞지 않았습니다. "나는 술과 여자 없이는 붓을 들 힘조차 없는 사람"이라고 말할 정도로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그는 궁중의 엄격한 규율을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하루에 술 석 잔 이상 마시지 말라는 어명도 있었지만, 더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예술적 자유의 제약이었습니다. "나라 말아먹으려고 들어오는 놈들한테 내 그림을 바쳐요?"라고 외치며 궁을 당당하게 빠져나간 그는 다시 세상 밖으로 달아났습니다.
김병문 선생은 장승업에게 의미 있는 조언을 했습니다.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이 땅의 고통스러운 삶을 있는 그대로 그릴 순 없는가? 뭇 백성들이 기댈만한 곳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진경이 아닌 성경으로 그들에게 위안을 줄 수 있다면 그 또한 화공들의 천명이 아니겠습니까"라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장승업은 "그림은 그림일 뿐입니다. 개화당이 이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일과는 다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예술과 정치를 분리하려는 그의 신념이었습니다.
방랑 중에 장승업은 삼남지방의 넓은 농토를 보며 "저 넓은 농토가 백성들의 주린 배는 못 채우고 탐관오리들의 헛배만 불리우니 삼남지방 곡창인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라고 탄식했습니다. 세상의 부조리를 목격하면서도 그는 "지나가는 화공이 그냥 배경만 준다면 그려주겠습니다. 좋은 그림이 그릇에 박혀 있다고 해서 달라지는 세상이 아니니까"라며 자유롭게 살아갔습니다. 몸도 마음도 지친 노년에 그는 도자기 가마에서 "어디 그게 우리 마음대로 되는 일인가요? 불이 만드는 거지요"라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예술도 결국 작가의 의도를 넘어선 무언가에 의해 완성된다는 통찰이었습니다.
장승업은 홀연히 세상을 등지고 사라졌습니다. 영화는 그를 미화하지 않고 사실 그대로를 나타내고자 했습니다. 예술은 반드시 안정적인 생활 속에서만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삶 속에서 창작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삶이었습니다. 거지에서 시작해 도화서 감찰까지 올랐지만 결국 자유를 택한 장승업의 선택은, 진정한 예술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출처]
영상 제목/채널명: https://youtu.be/FIn2R34CwMM?si=1g0ux4xXG3f5FYr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