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은 한국 영화사에서 가장 독보적인 작품 중 하나입니다. 미술을 전공한 감독의 뛰어난 회화적 감각과 불교 철학이 결합된 이 영화는, 단순한 종교 영화를 넘어 한국적 미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영화 속 핵심 장면을 통해 작품이 담고 있는 철학적 깊이와 예술적 가치를 살펴보겠습니다.
화두를 통해 본 불교적 깨달음의 여정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혜곡 화상이 기봉 수자에게 화두를 내리는 순간입니다. 깊은 산골 계곡을 배경으로, 화면의 소실점 중앙에 작게 배치된 두 스님의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동양화를 연상시킵니다. 혜곡 화상은 불교계의 선지식으로서 깊은 깨달음을 얻은 큰 어른이며, 그가 기봉 수자에게 던지는 화두는 "마음 달이 물밑에서 차오를 제 나의 주인공은 어디로 가는가"입니다.
이 화두의 의미를 해석하면, '마음 달'은 속세의 욕망이 아닌 해탈과 견성성불에 대한 갈구를 의미합니다. 물밑에서 서서히 차오르는 마음 달은 수행을 통해 점진적으로 성장하는 깨달음의 과정을 상징하며, '나의 주인공'은 곧 참나, 즉 진정한 자아를 뜻합니다. 선불교에서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화두는 가장 유명한 공안 중 하나로, 이에 대한 정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깨달음이란 언어적 설명이 아닌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세 명의 등장인물을 통해 이러한 깨달음의 다양한 층위를 보여줍니다. 노승 혜곡 화상은 묵언 속에서 자연과 완전히 하나가 된 존재로, 이미 깨달음에 도달한 인물입니다. 중년의 기봉 수자는 살인이라는 과거의 죄업 속에서 속죄와 구원을 갈구하며, 불교에 귀의하여 참나를 찾고자 합니다. 어린 해진 동자는 세상의 모든 이치가 궁금하고 순수한 의문을 품은 인간 본연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이들의 만남과 이별을 통해 영화는 윤회하는 세상의 이치를 깊이 있게 탐구합니다.
한국적 미장센과 회화성의 완벽한 조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바로 탁월한 미장센입니다. 미술을 전공한 배용균 감독은 영화의 모든 장면을 하나의 회화 작품처럼 구성했습니다. 특히 화두를 내리는 장면에서 인물을 화면 중앙의 소실점에 아주 작게 배치하고, 대신 거대한 자연을 화면 전체에 펼쳐놓은 구도는 매우 인상적입니다. 앞쪽의 거대한 바위, 흐르는 물, 울창한 나무, 그리고 위쪽을 감싸는 안개까지, 모든 자연적 요소들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구도는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인물이 영화의 중심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작게 표현한 것은, 인간이 자연의 일부이며 결국 자연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불교적 세계관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것입니다. 이는 노장 사상의 핵심 개념인 '물아일체'와도 깊이 연결됩니다. 물아일체란 나와 사물이 하나가 되는 경지, 즉 주객의 구분이 사라진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 장면은 바로 그러한 경지를 영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 영화의 화면 구성은 김홍도나 강세황 같은 조선시대 화가들의 그림과 유사한 구도를 보여줍니다. 삼원법이나 산점투시 같은 한국 전통 회화 기법들이 영화 곳곳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으며, 윤두서의 초상화와 같은 절대 구도의 자세가 수시로 등장합니다. 이는 단순히 동양적 분위기를 내기 위한 장식적 요소가 아니라, 한국 전통 미학을 현대 영화 언어로 승화시킨 것입니다. 화면 속 인물들의 심리 상태와 영적 여정을 외적 풍경을 통해 보여주는 이러한 미장센은, 불교적이면서 동시에 한국적이고 동양적인 독특한 영화 언어를 창조해 냅니다.
한국영화의 정수, 체험으로서의 깨달음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은 스토리, 편집, 구도, 의식의 흐름 등 모든 측면에서 불교 철학과 한국적 정신,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회화적 기법이 완벽하게 결합된 작품입니다. 서구에서 유입된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한국적 미학과 철학을 가장 높은 수준으로 담아낸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대 시절 이 영화를 수없이 반복해서 본 비평가가 있을 정도로, 이 작품은 관객에게 깊은 사유와 감동을 선사합니다.
영화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현재 볼 수 있는 버전은 2시간 20분이지만, 원래는 3시간이 넘는 버전도 존재했습니다. 느린 템포와 명상적인 분위기, 그리고 복잡한 불교 철학적 내용 때문에 관람이 만만치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어려운 관람 과정을 견디고 난 후 느끼는 정신적 충만함과 행복은 그 어떤 영화에서도 얻기 힘든 특별한 경험입니다.
영화가 보여주는 만남과 이별, 그리고 윤회의 세계관은 우리 삶의 본질적인 질문들을 던집니다. 부모의 윤리마저 저버리고 불교에 귀의하여 해탈을 추구하는 인물들의 모습은 극단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동시에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갈구를 드러냅니다. 세상 만물과 자아가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의 경지, 참나를 찾아가는 견성성불의 과정은 종교를 떠나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궁극적 자유와 평화의 다른 이름입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은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깨달음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화두에 대한 정답이 없듯이, 이 영화 역시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대신 관객 스스로 사유하고 느끼며 자신만의 깨달음에 도달하도록 이끕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예술 영화의 가치이며, 한국 영화사에서 이 작품이 차지하는 독보적인 위치의 이유입니다.
출처
영상 제목/채널명: 영화비평, 중독과 해독 - https://youtu.be/xlXAePrbicM?si=DPD7KkvuL3aev8l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