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영화사의 거장 김기영 감독의 후기 대표작 <이어도>는 마술적 리얼리즘과 신비주의가 결합된 독창적인 작품입니다. 1977년 개봉 당시 검열로 삭제되었던 15분 분량이 1997년 부산국제영화제 회고전을 통해 복원되면서, 영화는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작품으로 재탄생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이어도>의 혁신적인 서사 구조와 상징체계, 그리고 한국 사회에 던지는 비판적 메시지를 심층적으로 분석합니다.
검열 복원과 네크로필리아 상징의 재발견
영상자료원에서 공개된 <이어도>는 1977년 극장 개봉판과는 전혀 다른 작품입니다. 김기영 감독은 1997년 부산국제영화제 회고전을 위해 검열에 의해 삭제된 15분 분량을 복원하는 조건으로 참여했고, 이는 영화의 본질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특히 엔딩 부분에 등장하는 네크로필리아, 즉 시신 유해 애착 모티브와 남근 숭배 사상이 드러나는 장면은 한국 영화사상 가장 충격적인 장면 중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충격 요소가 아니라 영화의 핵심 주제를 관통하는 상징입니다. 김기영 감독 특유의 선험적 욕망의 에너지가 복원된 장면을 통해 다시 살아나면서, 영화의 주제적 측면도 보다 강력해졌습니다. 제주도 해녀 공동체라는 여성 중심 사회에 침입한 남성 외부인의 욕망과 파괴성이 이러한 상징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복원 버전의 의미는 2006년 파리 시네마테크 김기영 회고전에서 더욱 명확해졌습니다. 놀랍게도 불어 자막 싱크가 맞지 않는 상황에서도 현지 관객들은 이미지와 사운드의 결합만으로 영화를 정확하게 이해했습니다. 이는 김기영 영화가 언어와 문화를 초월하는 보편적 영화 언어를 구사하고 있음을 증명합니다. 미국에서 온 여성 관객과 프랑스의 젊은 영화팬들은 문어체식 대사 없이도 영화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으며, 이것이야말로 세계 관객과 호흡할 수 있는 김기영 감독의 영화적 에너지라 할 수 있습니다.
플래시백의 교과서, 왕복 플래시백 구조의 혁신
<이어도>의 가장 독창적인 형식미는 총 6명의 증인이 등장하는 7개의 플래시백으로 이루어진 다중 다층적 서술 구조에 있습니다. 다중 플래시백 구조 자체는 <라쇼몽>이나 <시민 케인> 등에서 이미 시도된 바 있지만, <이어도>의 플래시백은 이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특성을 보입니다.
일반적인 플래시백 영화들은 과거와 비교되는 현재로의 회귀 시점을 명확하게 제시합니다. 그러나 <이어도>는 현재로의 회귀 지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전체 러닝타임에서 현재 시제는 오프닝 2분과 클로징 4분, 총 6분에 불과합니다. 주인공이 우연히 파랑도의 언덕에서 여인을 기다리는 장면에서 시작된 현재는 마지막 장면까지 영화의 시간성에 개입하지 않습니다. 대신 영화는 '과거 속의 현재', 즉 '플래시백 안의 플래시백'을 보여줍니다.
<라쇼몽>과 비교하면 차이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라쇼몽>은 라쇼몽 성문 아래로 반복적으로 회귀하며 현재 시점을 유지하지만, <이어도>는 현재로의 회귀 대신 서로 다른 등장인물의 플래시백이 끝날 때마다 '우연의 플래시백'으로 되돌아갑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셔틀 플래시백', 즉 '왕복 플래시백'이라 명명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왕복성이 <이어도> 플래시백 구조의 핵심이며, 이를 통해 내러티브의 모호성과 캐릭터의 기묘함이 관객에게 한층 더 강렬하게 전달됩니다.
흥미롭게도 김기영 감독은 관객의 독해를 돕기 위한 일종의 '구독점'을 사용했습니다. 첫 번째와 마지막 플래시백을 제외한 나머지 플래시백에서 "뽀글뽀글 뽀글" 하는 공기 방울 소리가 삽입되는데, 이는 메인 플래시백에서 개별 플래시백으로 이동하는 순간마다 나타나 관객에게 '지금부터 시공간의 단절과 비약이 시작됩니다'라는 신호를 보냅니다. 이러한 사운드 효과는 파랑도의 섬 공간과 해녀를 상징하면서 동시에 시퀀스 간 분리를 공고히 하고 이야기의 흐름을 유지시켜 주는 이중적 기능을 수행합니다.
이항 대립 구조로 해부한 근대화의 폭력성
<이어도>는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다양한 이항 대립 구조를 통해 성적 본능과 권력의 문제를 강화합니다. 거시적으로는 근대와 전근대의 대립, 이성 대 비이성의 충돌, 자본주의 대 원시주의의 대립을 묘사하고, 미시적으로는 남녀, 바다와 육지, 문명과 풍습 등 반대되는 구조를 영화 전편에 제시합니다.
형식적 측면에서도 이러한 대립 구조는 뚜렷합니다. 배경이나 렌즈 필터를 이용한 붉은색과 푸른색의 대조적 사용, 밝음과 어두움을 대비시키는 조명은 독특한 시각적 경험을 제공합니다. <하녀>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어도>에서도 과장과 비논리로 가득 찬 김기영식 미장센의 향연이 펼쳐집니다. 문어체식 대사와 원색의 조명 사용은 여전하며, 공간의 활용은 한층 더 치밀해졌습니다. 스크린의 경계를 적극 활용하기 위해 화면의 양쪽 끝을 어둠으로 처리하거나, 두 개의 방을 좌우에 두고 한 장면 속에 두 개의 프레임을 만들어내는 기법은 매우 돋보입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1970년대 한국 영화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환경 오염에 대한 경고입니다. 이는 산업 자본주의의 병폐를 바라보는 김기영의 작가주의적 시선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한국 사회의 집단적 무의식과 남성 중심의 편력, 근대화에 대한 부작용을 해부한 이 작품은 제주도 해녀의 공동체라는 특수한 배경을 통해 보편적 문제를 제기합니다. 제주도라는 지역 제한적 사항을 뛰어넘지 못한다는 지적도 있지만, 오히려 이러한 지역성이 어디까지 보편성으로 확장될 수 있는지를 실험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가 타당합니다.
<이어도>는 검은 마성의 미학과 마술적 리얼리즘, 신비주의와 초현실주의가 결합된 김기영 영화의 정수입니다. 복원된 15분은 단순히 삭제 장면의 회복이 아니라 작품의 본질적 전환을 가져왔으며, 혁신적인 왕복 플래시백 구조는 영화 서사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습니다. 여성 중심 공동체에 침입한 남성 외부인의 욕망과 파괴, 그리고 근대화의 폭력성을 다층적으로 해부한 이 작품은 지역적 특수성을 넘어 한국 영화사의 중요한 이정표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출처]
고전영화극장: 플래시백의 교과서, 김기영의 [이어도] / 씨네포커스: https://youtu.be/pZcc3mSteZg?si=gTG-85kKO8MINVkM